기억나니 을사조약? 바로 그 현장 '덕수궁 중명전'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오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 같이 운동하는 대학생과 역사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전 좀 놀랐습니다. 그 친구가 을사조약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최근 한국에서는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학교들이 많이 있는데요,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게 정말 충격적이네요. 역사는 잊는 순간 계속 반복된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왜 가르치지 않는 걸까요? 일제강점기를 완전히 잊은 우리 후손들이 또 다시 일본의 군대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날이 또 오지 않는단 보장이 있을까요?

독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우리 것이라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왜 우리것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치지 않은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가슴아픈 역사를 고스란이 담고 있는 덕수궁의 중명전(重明殿)에서 당시 대한제국이 당했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 알려드릴게요.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 조차도 모르는 게 정말 부끄러운거죠.

 

 

 

 

 

을사조약을 왜 '을사늑약'이라고 부를까요?

 

1905년 을사년 11월 18일 이른 새벽,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는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 등으로 불리기도 하죠. 그런데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조약(條約)'이란 말은 양국의 협의에 따라 체결되는 상호간의 약속같은 거에요. 그런데 1905년에 체결된 약속은 조약의 기본적인 조건인 '양국의 협의'가 빠져 있어 기본적인 조건부터가 결여되어 있어요. 그리고 '합의'가 아니라 '강압'에 의해 억지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란 뜻의 '늑약(勒約)'이라고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명전 앞에는 항상 '덕수궁'이란 말이 붙는데, 왜 궁 밖에 있을까요?

 

1895년 일본은 당시 친러정권이 들어선 조선에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한 구데타를 획책했는데, 그 과정에서 러시아를 끌여들인 민씨정권의 수장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합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에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아관파천을 감행합니다. 쉬운 말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 간겁니다. 이때부터 고종은 사비를 털어 경운궁(당시 덕수궁의 이름) 주변의 땅을 조금씩 사들여 중명전을 짓기 시작하는데요, 이곳이 여러나라의 대사관에 둘러쌓인 곳이라 일본이 무력침략을 할 수 없는 안전한 땅이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위치가 덕수궁에서 빙 둘러가야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명전(重明殿)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란 뜻입니다.

 

 

 

 

 

 

혹시 어제 배재학당 포스팅을 보셨나요? 이 사진은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선생이 1899년에 담은 중명전(원래 이름은 '수옥헌'입니다.)의 사진입니다. 사진은 현재 배재학당에서 소장하고 있어요. 이건물은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찐이 설계했는데요,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려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사바찐'이란 이름 혹시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제가 예전에 포스팅했던 인천의 '제물포구락부' 건물도 같은 사람이 설계한 건물입니다. 못 보신 분들은 아래 글 참고하세요.

 

한국 근대교육의 살아있는 앨범, 정동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의 시작점, 인천 '개항장' 둘러보기

 

 

 

 

 

 

이제 중명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길다란 복도가 참 멋스럽네요. 참고로 이곳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어요. 슬리퍼를 갈아신고 들어가야 하는데요, 혹시 향기(?)가 좀 심하신 분들은 참고하시라고요 ^^*

 

 

 

 

 

 

입구에 들어서니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는 느낌이네요. 바닥의 타일 또한 사람들이 밟아서 훼손 될까 강화유리로 모두 덮어서 보존하고 있군요. 멋집니다.

 

 

 

 

 

 

이곳은 을사늑약의 당시를 증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고종이 머물던 이곳을 군대를 동원해 침범하고 왕과 대신들을 협박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통감부란 기관을 만들어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글은 일본을 증오하자는 취지의 글이 아닙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얼굴이 어떤지 현실을 바로 알자는 거에요.

 

 

 

 

 

 

그렇다면 을사늑약(을사조약)의 내용이 어떤지 실제 문서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문서들은 사본인데요,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위 글을 조금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문

일본과 한국 정부는 두 국가를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한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한다.

 

제1조, 일본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와 사무를 지휘감독하며, 일본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 관리와 백성, 그리고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있는 조약을 완수할 의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인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처음 1조와 2조에서부터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제3조, 일본정부는 대한제국 황제폐하에게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서울)에 주재하며 황제폐하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또한 일본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했던 모든 권한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사무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대한제국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모든 권한은 일본이 임명한 관리들이 가진다는 뜻이 되겠군요. 황후마저 죽인 일본정부가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 보증한다니, 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이상의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는다.

 

광무 9년 11월 17일

외무대신 박제순 (인)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인)

 

이로서 한국은 일제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고종이 끝까지 거부했던 조약을 찬성한 대신들입니다.

황제도 없는 곳에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르는 놈들이죠.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을사늑약 이후,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종을 필두로해서 대한제국의 치열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한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각 나라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립니다. 전국의 유생들은 상도운동도 벌였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자결로서 저항했습니다. 서울 종로거리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도 휴교에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는 의병들이 조직되어 민종식과 최익현 등 많은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어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같은 언론사들도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항일 저항운동을 고조시켰습니다.

 

 

 

 

 

 

중명전에는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장은 대한제국 고종 임금의 황제어세입니다. 현재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고종이 비밀리에 보내는 밀서에 이 도장을 찍어서 보냈습니다.

 

 

 

 

 

 

국새가 찍혀있는 위 문서는 영국 '트리뷴'에 보도된 고종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입니다.

 

 

ㅇ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1905년 11월 17일 일본 대사와 박제순이 체결한 다섯 조항은 대한제국 황제가 승인한 것이 아니며 국새를 찍지도 않았다.

2. 대한제국 황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무단 반포함을 반대한다.

3. 대한제국 황제는 독립된 주권을 한 치도 타국에 내주지 않았다.

4. 일본의 외교권 늑약도 근거 없는데 하물며 내치상에 한 건이라도 어찌 인준할 수 있겠는가.

5. 대한제국 황제는 통감의 상주를 허락치 않고, 황제권을 한 치도 외국인이 맘대로 함을 허락치 않는다.

6. 대한제국 황제는 세계 각 대국이 한국외교권을 함께 보호하길 원하고, 기간은 향후 5년으로 할 것을 원한다.

 

광무 10년 1월 29일 국새(國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장면

 

 

헤이그 특사의 목숨을 건 도전과 좌절

 

또한 고종은 을사늑약이 당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압적로 체결되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일본 몰래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비록 특사들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고 '만국평화회의보' 와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국제사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이 사건을 알게된 당시의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를 서울로 불러, 함께 고종을 협박하는데요, 밤을 새워 항거하던 고종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시킨다.'는 황태자 섭정의 조칙을 승인하고 맙니다. 그러나 일제와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각료들은 이 조칙을 '양위(임금의 자리를 내어줌)'로 왜곡 발표하고, 20일에 양위식을 강행해버립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및 경찰서 등을 습격해 파괴했고 친일의 끝판대장인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일대 수라장이 됩니다.

 

 

 

 

 

 

 

결국 빼앗긴 대한제국

 

고종과 대한제국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결국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고종의 도서관이자 국귄회복을 위한 노력이 서려있는 중명전은 외국인의 사교클럽으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됩니다. 광복이후 이곳은 고종의 차남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동극장에 매각되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문화재청이 다시 매입해서 덕수궁에 포함시켜 관리중인 곳이랍니다.

 

치욕적인 을사늑약,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 관람료 : 무료

+ 운영시간 : 10:00~17:00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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