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 ★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세심대(洗心臺)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저번 달에 독락당 올리고 이제야 후속편을 올리네요. 아무튼 오늘은 전편에 이어 독락당(獨樂堂) 주변을 휘~ 둘러보겠습니다. 경주 안강읍에 자리잡고 있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의 주변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동양화를 연상시킵니다. 또한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끼고 있는 자계천은 한여름 발을 물에 담그고 소풍놀이 하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락당이나 민박에서 숙박을 하신다면 수박한통 들고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우연찮게 제가 간 날에 비가와서 바위들이 더 촉촉해보여서 분위기 좋네요. 자 구경해 볼까요? 


독락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 마을의 이름은 '세심마을'입니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은 '자계천'이라고 부르더군요. 독락당의 주인이였던 회재 이언적은 주변의 아름다운 산과 바위들에 손수 이름을 지어 사산오대(四山五臺)라 불렀습니다. 동쪽으로 화개산, 서쪽으로는 자옥산, 남쪽으로 무학산, 북으로는 도덕산을 사산(四山)이라하고, 자계천 주변의 편편한고 큰 바위들은 옥산서원 앞의 세심대(洗心臺), 독락당 계정 아래의 관어대(觀漁臺), 관어대 맞은편을 영귀대(詠歸臺), 독락당 북쪽에 탁영대(擢纓臺)와 징심대(澄心臺) 를 오대(五臺)라 하였습니다. 전편의 독락당 '계정'이란 정자를 찍은 사진이 기억나시나요? 그 사진을 한장은 관어대에서, 또 한장은 영귀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세요.


2013/07/19 - [여행/국내여행] - 회재 이언적의 삶을 따라 경주'독락당'에서의 하룻밤.








세심대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자계천의 풍경입니다. (세심(洗心)이란 마음을 깨끗이한다라는 뜻입니다.) 비온 후에 물이 많으면 이 편편한 바위위에도 물이 흐르는데, 최근 비가 오지 않아 지금은 왼쪽 숲쪽으로만 물이 흐르네요. 제가 찾아간 날은 운이 좋은 것인지 안좋은 것인지 아무튼 기분은 상쾌한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한여름 더운 날, 자계천 세심대 계곡에 수박을 한통 넣어두고 가족들과 깨먹고 싶군요.

편편한 바위들이라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주변에 나무그늘이 많아 소풍에는 최적의 장소인거 같네요.









세심대(洗心臺)에는 작은 폭포와 연못이 있는데 용추(龍楸)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용추 소(沼)에 있는 폭포니 이 폭포는 용추폭포가 되겠군요.

자연적으로 깍인 연못과 폭포지만 누기 일부러 파 놓은 것처럼 절묘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못은 어른키 정도로 약간 깊기 때문에 아이들 물놀이 할때는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용추 폭포 한쪽에는 이런 나무다리가 하나 있네요.

건너가보면 식당이 보이는데요, 물길을 따라 600-7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독락당이 나옵니다.







오늘 덥지않고 비가외서 기분도 정말 상쾌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옷이 흠뻑 젖었지만 기분은 상쾌합니다.






<역락문>


여기는 자계천 세심대에 위치해 있는 옥산서원 입구 역락문입니다.

제가 독락당에서 하룻밤 머문 방이름 혹시 기억나시나요?

그 방 이름이 바로 '역락재(亦樂齋)' 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이 역락(亦樂)이란 말은 논어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니 그아니 즐거우랴. 


 

이 편액도 독락당 역락재와 마찬가지로 '석봉 한호' 한석봉이 쓴 글씨입니다.


자~ 역락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계곡의 한 지류가 역락문 뒷편으로 흘러가고 있네요.

농사를 위한 농수로 처럼 보이는데 아랫마을로 가는 물인거 같습니다.

자연을 강제로 바꾸거나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사용하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가 보이는데요, 무변루 아래로 난 문을 들어서면 옥산서원 구인당(求仁堂)이 보입니다.

이곳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이언적 사후 20년이 된 해인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습니다.

이후 선조 7년(1574년)에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賜額)서원이 되었습니다.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서원이나 사당 등의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옥산서원 구인당 건물 앞 좌우로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있는데

이 곳은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수학을 닦는 재실입니다.

 

 

 

 


<선조가 하사한 옥산서원 편액>


이 편액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입니다.


우리 옛 건물들은 모두 각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정답습니다.

요즘은 주소 즉, 숫자로 집을 구별하는데 옛날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모두 부여한 것이 참 멋스럽습니다.

건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방마다 이름을 따로 만들어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옥산서원 내부에는 '구인당'이란 편액이 걸려있네요. 옥산서원의 편액이 추사의 글씨임에 반해, 이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입니다.

 

구인(求仁)이란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입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갔으나 중종 25년(1530)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조정에서 축출당해 옥산서원 위에 있는 제가 하룻밤 묵었던 독락당에서 성리학연구에만 전념하였습니다. 7년후 김안로가 탄핵당한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오른 후 1545년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나 무고하게 연루된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생활동안 <구인록(求仁錄)>이란 저술을 남겼는데 구인당의 '구인'은 아마도 거기서 가져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仁(어질 인)을 추구한다는 말인거 같네요.

 

 

 

 




방금 제가 들어온 입구가 여깁니다.

옥산서원의 입구인 역락문문을 들어서면 누각 '무변루(無邊樓)'가 서 있습니다.(구인당 맞은편)

무변루라는 말은 주자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왔는데 '경계없는 자연' 이란 뜻입니다.

무변루 마루 안에 있어 잘 보이진 않지만 자세히 보시면 현판이 보입니다.

이 현판도 '석봉 한호' 한석봉 글씨입니다.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도비.

 

 

 




글 읽어보세요 ^^*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요?

이건 사람의 변을 지게에 짊어지고 밭에다 거름을 주기위한 '똥장군'이란 것이지요.

제가 어린 시절에 똥장군을 짊어진 분들이 많았었죠. 특히 호박밭은 죄다 똥밭이였어요.ㅎㅎㅎ

울 아부지가 젊은시절 지게로 매일 수십번 짊어지셨던 똥.장.군. 에효...

 


독락당과 자계천에 놀러오셨다면 옥산서원에서 회재 이언적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요?

다음시간은 주변 맛나는 집에서 밥한끼 먹고 양동마을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옥산서원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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